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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확신의 범주

시편 73편 묵상

by 고명환2024-04-25

1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왜 그 사람들이 대화 중에 내게 화를 냈었는지. 


“고 선생님과 얘기하기가 힘들어요. 자기 주장으로 끝까지 설득하려 해요.” 

30대 때 한 학우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여러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고 주로 반박하던 내게 격앙되어 분을 표출했다. 


40대 때에도 비슷한 말을 들어야 했다. 

“전도사님하고 말 못하겠어요. 왜 내가 하는 말마다 아니라고 해요?”

평소 친하던 나이 어린 신학도와 커피를 마시며 한가하게 이야기하던 중 들은 말이다. 그가 던진 말들은 가볍게 지나칠 만한 이야기였는데 꼬치꼬치 ‘아니요’로 응수했고 참다 못한 그가 화를 내며 한마디 했던 것이다. 


50대에 들어서 아니나 다를 까 또 분노 섞인 말을 맞이해야 했다.   

“목사님은 언제나 아니라고 말해요. 내게 잘했다고 하는 법이 없어요.”

주변에서 알게 된 동년배 목사님이 대화 중 얼굴을 붉히며 충청도 억양으로 퍼부은 말이다. 본인 딴 에는 열심히 많은 일을 벌이고 뛰어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앞에 앉은 화상은 사사건건 칭찬은 커녕 태클 걸기에 바빴으니 충분히 화가 날 법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사람이 내 안에 숨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경청하고 공감해 주지 못했다. 내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사수하려 했지 상대의 생각을 꼼꼼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벼이 여기고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가르치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버릴 수 없었지 않았는가. 자연히, 우호적인 만남에서 조차 긴장의 순간들을 조성하고 뒤끝을 개운치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나이 들어, 그때와 달라진 점을 찾자면 내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정도이다. 지난날의 나는 검증되지 않은 여러 분야의 설익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지나치게 강한 확신을 만들어 냈고, 그것으로 자주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려 했다. 물론, 알량한 지식 안에는 많은 거짓이나 편견이 섞여 있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막히지 않은 이슈를 막힌 것으로, 다양한 의견을 하나라고 주장하며 가까운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근래,  대화를 발전적으로 이어 나가기 힘든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아 ~ 그거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이 말 뒤에 앞뒤 문맥이 없어진 성경의 몇 구절이 나열되고 단순하지 않은 문제는 깔끔하게 결론에 이른다. 느지막한 나이에 복음을 알게 되어 교수라는 본업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말 그대로 불철주야 뛰어 다니는 분이 복잡한 신학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작용하고 있어요.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중에 아멘을 많이 강요하는 목사님들이 현 시대에 떠오른 여러 이슈들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법이다. 이 해석과 대처 방법의 프레임은 유연성이 뛰어나서 어떤 문제에 씌워도 들어맞는 것 같다. 이 가설 앞에 모든 이성적인 논의는 설 곳이 없게 되고 합리적인 접근 방법들은 영적이지 못한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이성적 논리를 펴는 사람은 기독교 진리를 허물 가능성을 가진 경계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류의 사람들과 언쟁할 에너지도 없고 승산도 없는 것을 알고 나면 다음부터는 반가운 인사 가벼운 대화 이상으로 진행하지 않지만, 그 막힌 현실이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다. 너무도 확고한 철학과 지식으로 모든 의제를 가볍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느끼는 좌절감 또한 한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한편, 그들 속에서 지나간 나를 본다. 나로 인해 좌절하며 화를 삭였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올라온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세상의 모든 일과 현상에 대한 명쾌한 답이 주어졌는가?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확신과 단정의 태도를 보이기 원하시는가? 또, 그분은 우리에게 언제나 한 가지 길만을 제시하고 그것만을 선택하기 기대하시는가? 


2

시편 73편 아삽의 노래


1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2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3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5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6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8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9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10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11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12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13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14하나님,

주님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15“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16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21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22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이후 구절 생략, 새번역)

시인은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복을 받아 잘되고 악인들은 응당 벌을 받고 망한다는 단순한 믿음과 기대로 살았다. 헌데, 현실은 그의 믿음을 비웃듯 악인들의 편이다. 악한 일만을 일삼는 자들이 벌을 받는 건 고사하고 평화롭게 자기들 세상인양 버젓이 활개치며 다닌다. 헛된 상상만 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함부로 말하고, 하늘을 비방하며, 남을 비웃고, 폭력을 행사한다(4-9절)


그런데도 악인들의 신세는 편하고 재산은 계속 늘어간다. 기막힌 일은 이들의 번성함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마저 ‘하나님인들 이런 일을 알고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하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모습이다(11절)


이런 왜곡된 현실은 시인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다. 믿음을 버리고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한다(1-2절). 거만한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과 가진 재산은 시샘거리로 바뀌었고, 옳다고 믿고 걸어온 정직하고 진실한 길은 의문스러워진다.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13절)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은 온종일 그를 괴롭혔다(14절). 마침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해답을 얻는다(17절). 그것은 악인이 세상에서 번성하고 평안을 누리나 결국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인생들이라는 가르침이었다. ‘한낱 꿈처럼 그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이었다(18-27절)


스스로 풀 수 없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난 뒤,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시인한다.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다”고. 다만 자신은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 이었다”고(22절)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개인이 보유한 신앙 지식과 관점을 가지고 다양한 현상을 모두 해석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잘못하면 믿음마저 좌초될 수도 있다. 많은 세상의 현상은 전통과 신앙 지식으로 설명해 낼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니거나 모호한 것들이다. 아니면 시인이 씨름해야 했던 기대를 꺾어 버리는 역 현상들이다. 


물론, 이러한 도전적인 현상이 이미 계시된 말씀과 전통으로 형성된 신앙의 체계를 허물지는 못한다. 시인이 일찍이 간직해 왔던 신앙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모순되는 현상을 바라보고 믿음을 저버릴 뻔했던 것은 그가 가진 일반적인 신앙의 법칙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 만으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난제를 만났을 뿐이다.  


이때, 취할 방책은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의문을 품었던 생각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그 자리가 뒤로 미끄러지지 않을 자리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자리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자리이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자리인 것이다. 


참고) 생략한 구절에서는 시인의 완전한 회복과 다짐을 기록했다. 


3

흔히들 욥기는 한 개인의 영웅적 믿음을 보여주는 책 정도로  가벼이 여기고 신중한 탐색을 내려 놓는다. 물론 그에 관한 절대적인 믿음의 기록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돋보인다. 그럼에도, 진지한 독자라면 놓치지 않을 책 안에 담긴 흥미로운 지식과 진리가 간과되는 점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사실, 욥과  관련된 에피소드만을 기록한다면 요나서 정도의 분량이면 족할 텐데 성경이 방대한 양을 할애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독자를 지치게 할지 모를 욥과 그의 친구들의 지난한 담화 안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식과 교훈을 찾아야 하고, 긴 침묵을 깨신 후 인간의 논쟁을 종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그분의 섭리와 가르침을 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갑작스런 고난 중에도 변함없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의 적은 지식으로 크신 하나님을 담아내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설명한 결과는 무모하고 무의미한 시도로 끝나 버린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나름대로 자기 주장을 펴는 방문객들(친구들) 앞에서 그가 가진 지식과 지혜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반박하고 그려냈지만 하나님은 이런 욥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욥은 스스로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시인했다[욥기42:5]). 크신 하나님을 정의하고 규정하려 했던 그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아무리 많은 말과 적절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다. 아니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형상화 하려는 의도가 금송아지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모욕적인 결과를 낳고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들은 욥은 시인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욥기42:3) 


그가 인정했듯이 욥은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많은 설명이나 묘사는 원점에서 작은 각으로 출발한 두 선의 간격이 갈수록 점점 벌어지듯, 더욱 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차라리 원점에 머물러 나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욥의 경우처럼 많은 말을 하는 쪽을 택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 현상에 대해서. 모호한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자르고 다듬어서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전체를 드러내시지 않은 것에 대해 주어진 부분을 전체로 확대묘사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열린 여러 가능성을 한 가지 가능성으로 좁히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분은 사람들이 물어오는 의문에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다. 과거와 미래는 물론 하늘의 비밀까지 알려 주셨다. 듣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자주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시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신 것은 아니다. 어떤 화제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하시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두셨다. 어려운 질문을 피하시기 위해서나 물의를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 그러신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시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나가도록 맡겨 두신 것이다. 


예수님의 행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골칫거리를 넘어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종교 전통을 무너뜨리는 반동으로, 그동안 향유해 왔던 권위를 약화시키는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특히,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성전에서 벌이신 소동이나 여러 혁명적인 가르침은 그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마가복음11:18)


두려움의 증폭은 분노와 적대감의 수위를 높였고 급기야 조직적인 행동으로 발전한다. 유대교 교직을 대표하는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이 대거 성전에 머무시던 예수님께 몰려왔다. 이들은 유대교의 경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교직 제도로 따지자면 목사들, 신학자들, 장로들에 해당하는 무리가 연대해서 나사렛 예수에게 권력시위 하듯 찾아왔던 것이다(마가복음11:33)


그들은 묻는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종교적인 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이런 일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사람이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소란을 피우는 거요?’라는 뜻으로 묻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찾아온 이유는 듣고 알아보고 토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질문 역시  답을 듣기 위해서나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하려고 건넨 것이 아니다.   


이에, 예수님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질문으로 응수하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내게 대답해 보아라.”(마가복음11:29-30) 


마가의  설명이 보여주듯( 마가복음31-32)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예수님 질문은 몰려온 종교지도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어느 선택도 좋은 결과로 돌아 올 게 없는 선택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정답을 말할 수 없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손해보지 않을 선택을 한다.

“모르겠습니다.”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하자 이들은 의논 끝에 회피성 답변으로 궁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대답을 들으신 후, 그들이 앞서 던진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시겠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고 맡기셨다.

‘사사건건 해명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모든 말과 행적이 내가 어떤 권위를 가졌는지 말해 주지 않느냐’고.  

‘성경의 예언과 내가 행사한 능력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설명과 설득을 통해 당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답을 찾아 가도록 그들의 몫으로 넘기셨던 것이다. 


4

우리 안에, 당면한 문제와 보이는 현상에 대한 모든 성경적 해답이 주어졌다고 믿고 확신에 찬 해명을 생산해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나치게 강한 확신에 사로잡혀 본인 생각 외에 어떤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기독교 신앙을 콤팩트하고 단순하게 다듬는 재주가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구체화하고, 열어 놓은 것을 닫는 능력도 보여 준다. 그것에 따라 다진 신념과 지식은 절대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돌판이 된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자식이 빗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백신을 맞으면 영혼을 사탄에게 빼앗깁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선교와 전도입니다.’

‘우리의 세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겁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전쟁은 종말의 마지막 징조입니다.’

‘이 번역의 말씀만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기름 부으신 성경입니다.’

‘목사 직분은 오로지 남성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다 손꼽기 힘든 용감한 기독교 전위대들이 생산해 낸 확신과 단정은 어느새 진리가 되어 면역력이 약한 성도들을 감염시키고 있다.  반대로, 교회 바깥 이방인들에게는 더욱 복음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안팎으로 그 폐해가 보이지만 그들은 진리에 따르는 가벼운 부작용 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해서 확신을 만들고 유포해서도 안되고, 그 부작용을 경시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과 사고의 능력으로 사람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한 모든 속성과 현상을 밝혀 내고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를 해낼 수 있다는 태도는 마치 몇가지의 연장만 가지고 복잡한 기계의 모든 부품을 분리해 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은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지식 외에 스스로 창조하고 발견할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모호한 것을 뚜렷한 것으로 제시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놔두어야 하며, 밝혀질 것은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한 가지의 가능성으로 억지로 욱여넣어서도 안된다. 열어 두어야 할 것은 열어 두어야 한다. 


그것이 이전에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이다. 과거에 많은 사람이 오늘날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 때문에 핍박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들이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가르친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 시대에, 성경은 교육받은 성직자들만 읽고 해석해야 했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기 중 금기였다. 노예를 소유하고 부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경적인 제도라고 정당화하며  하늘 아래 반인륜적인 행위가 성행하던 때가 우리와 먼 과거의 시대가 아니다.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확신과 단정을 유보해야 할 다른 또 이유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즉 소통하기 위해서다.  확신과 단정으로 단단히 무장할수록 고립을 면하기는 어렵다. 들으려 하지 않고 신앙으로 석화한 생각을 놓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를 즐거워할 상대자는 없을 것이다. 헌데, 이 시대에 그런 불통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기독교란 인식이 크게 번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상과의 벽은 점점 두터워졌고 돌아온 것은 냉대와 따돌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리 수호의 훈장으로 착각하고 내부적으로 한층 그들만의 도그마로 단단히 무장하며 결속을 다져 나갈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지금의 생태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소음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아야 한다. 행여, 기독교 전체를 향한 적대감이 고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5

우리는 확신과 단정의 범주를 좁혀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또 복음의 길을 막지 않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와 유보가 따라야 한다. 내가 확신하고 단정했던 것을 내려놓을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들어 보려 하고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끝까지 고수해야 할 진리의 영역까지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등과 같은 타협할 수 없는 핵심 진리를 가감없이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 공고히 하고 전파해야 한다. 


다만, 명확하지 않는 것을 확신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전체로, 밝혀지지 않은 것을 단정하지 말자는 뜻이다. 그러려면 나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는 아니,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다른 사람과 삶의 방식이 다르거나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아픔을 겪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편향된 종교적 잣대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대해 더 개방적이고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에게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 보고 싶다고, 내 생각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나의 것을 잠시 포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아량을 갖기 바란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16절) 

현실은 시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풀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만으로 문제의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복잡한 이슈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안에도 여러 문제와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면 갈등과 분열이 뒤따르고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우리 안에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보다, 시인처럼 ‘풀기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는 자세가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러면, 섣부른 결론이 만들어낸 확신과 단정으로 타인이나 집단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고 배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 외에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세우신 불변의 진리의 기둥과 터와는 달리, 사람이 세워 나간 전통, 사상, 제도는 오류의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산물이라는 가정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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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명환

고든콘웰 신학교를 졸업(M.Div)하고,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생, 다문화가정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